이 팀 서사를 한번 제대로 적어보고 싶었어요. 요즘 영상으로 정리된 게 많아서 그거 보다가 저도 정리를 해봤습니다.
리센느(RESCENE). 장면을 뜻하는 SCENE이랑 향기를 뜻하는 SCENT를 붙인 이름입니다.
향을 맡으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잖아요. 프루스트 효과라고 하죠. 음악으로 사람 마음에 한 장면을 새기겠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래요.
그래서 앨범마다 메인 향이 있고 그 향을 음악에 녹입니다. 데뷔 때부터 이건 확실했어요. 뭐 하는 팀인지 흐릿한 중소가 대부분인데 이 팀은 색깔이 분명했습니다.
문제는 아무도 안 봤다는 거죠.
소속사가 더뮤즈 엔터테인먼트인데 2020년 12월에 자본금 1천만원으로 시작한 회사입니다. 대표 이주헌은 버클리 음대 나와서 보컬 듀오로 데뷔했던 사람이고, 프로듀싱 경영진이 전부 버클리 출신이에요.
이 회사에 아티스트가 리센느 딱 한 팀입니다. 회사 전부를 한 팀에 건 거죠.
처음 몇 년은 대표가 직접 운전했다고 해요. 방송국마다 프로필 수백 장 들고 다니면서 담당자한테 손편지를 썼고요. 첫 음방 날에는 이사가 인이어 착용법을 몰라서 다른 팀 매니저한테 물어봤답니다.
음악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매니지먼트는 처음부터 배워야 했던 거예요.
멤버 캐스팅도 대표가 발로 뛰었습니다. 리더 원이 캐스팅하려고 경남 거제까지 내려갔고, 미나미 때문에 일본 치바까지 날아갔어요.
원이, 미나미, 리브, 메이, 제나. 한국인 넷에 일본인 하나.
데뷔 시점 멤버 평균 나이가 만 16세였습니다. 열일곱도 안 된 애들이 회사 명운을 짊어지고 시작한 거예요.
선공개 yoyo 내고 데뷔곡 uhuh, 6월에 Counting Star. 음악은 청량하고 세련됐고 반응도 나쁘지 않았는데 안 떴습니다.
그리고 2024년 8월 첫 미니 신드롬. 타이틀이 LOVE ATTACK이었어요.
지금 리센느 하면 나오는 그 곡인데, 그때도 안 떴습니다. 어떤 웹예능에서는 코미디언들이 곡 제목 듣고 "하트 어택 아니야?" 하고 놀렸다고 하고요. 멜론 일간 차트 904위로 처음 이름을 올렸는데 사실상 차트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죠.
이 얘기가 저는 제일 슬펐어요.
메이가 예전에 걸었던 공약이 있습니다. 멜론 차트 톱100 안에 들면 서울에서 거제까지 뛰어가고, 미나미는 일본 치바까지 헤엄쳐서 가겠다.
얼핏 들으면 그냥 패기 넘치는 공약 같잖아요. 근데 뒤집어보면 톱100 드는 것조차 자기들한텐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뜻이에요.
어차피 그럴 일 없으니까 저렇게 말도 안 되는 걸 아무렇지 않게 건 거죠.
주저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유튜브 라이브를 미친 듯이 켰어요. 밤 10시 반에 시작한 라이브가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이어져서 5시간을 넘긴 적도 있고, 한 번은 7시간 16분을 찍었습니다.
대형 기획사 시스템이 없으니까 콘텐츠랑 진심이랑 체력으로 버틴 시간이에요.
2025년 2월에 미니 2집 글로우업, 드라마 OST, 6월 필밤, 9월 고백주파수, 11월 미니 3집 립밤까지. 정말 꾸준했습니다. 립밤 초동이 10만 4406장으로 자체 최고였고요.
근데 대중적인 한 방은 여전히 없었어요.
2026년 2월, 리더 원이가 개인 유튜브 채널을 엽니다. 이름이 "안녕하세요 원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예요. 띄어쓰기도 없이 길죠.
무명에 가까운 아이돌이 개인 채널을 여는 건 흔한 선택이 아닙니다. 원이도 나중에 개설 직전까지 부담이 정말 컸다고 했어요. 그래도 리센느를 조금이라도 더 알리고 싶어서 했다고.
그러다 3월에 미나미가 갸루 분장을 하고 나옵니다. 거제 출신 원이가 "너 지금 이러고 거제 가잖아, 거제 시민들한테 혼나" 하니까 미나미가 해맑게 받아쳐요.
거제 야호.
맥락도 없고 뜻도 잘 모르겠는 이 한마디가 그냥 알고리즘을 부숴버렸습니다. 야호는 일본에서 하이 같은 인사말이래요.
거제 여행 영상에 나온 통닭집에 실제로 관광객이 몰렸고, 거제시가 멤버 전원을 홍보대사로 위촉했습니다. 나중엔 고양시 수원시 경주시까지 줄줄이 이어졌고요.
제나랑 원이가 경상도 사투리로 티키타카하는 영상이 터지면서 제나한테는 신라 공주라는 캐릭터가 붙었어요.
한동안 리브랑 메이는 이 채널에 안 나왔습니다. 그래서 팬들이 더 애가 탔죠. 6월 12일에 둘이 같이 등장했는데 리브가 30분 내내 무리수 개그 던지다가 마지막에 난데없는 발가락 개인기로 빵 터뜨렸고, 메이는 앞선 멤버들 발자취 따라가면서 PPL까지 능청스럽게 소화했어요.
"저희도 리센느입니다" 하고 외친 그 영상 조회수가 446만입니다.
다섯 명 전원이 각자 캐릭터로 화려하게 데뷔를 마친 셈이에요.
밈으로 알게 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얘네 노래는 뭐지" 하고 찾아 듣기 시작했습니다.
2024년 8월에 나온 LOVE ATTACK이 멜론 일간에 슬금슬금 재진입하더니 무섭게 올라갔어요. 6월에 톱10, 실시간 최고 5위. 그리고 2026년 7월 8일 밤 10시, 멜론 톱100 1위.
발매하고 1년 11개월 만입니다.
톱100 들면 거제까지 뛰겠다던 그 공약이 여기서 소환됐죠. 100위가 아니라 1위를 해버렸으니까 이제 팬들은 저 공약을 어떻게 지킬지로 난리입니다 ㅋㅋ
7월 8일에는 리메이크 스페셜 싱글 Pretty Girl도 나왔어요. 선배 그룹 카라의 곡입니다. 역주행으로 뜬 팀이 다음 카드로 리메이크를 꺼낸 건데 저는 솔직히 처음에 의아했습니다. 지금 신곡을 밀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결과는 7월 14일 더쇼 1위. 데뷔 841일 만이었습니다.
수상 소감 때 다 울더라고요. 841일이 짧은 시간이 아니잖아요. 그 사이에 그만두고 싶었던 날이 없었을 리가 없고요 ㅠㅠ
거제 야호가 웃겨서? 그건 계기였을 뿐이에요. 밈은 수도 없이 생겼다 사라지잖아요.
저는 두 가지라고 봅니다.
첫째, 사람 냄새. 무대 위 아이돌의 아우라를 스스로 내려놨어요. 갸루 분장하고 망가지고, 추리닝 입고 사투리 쏟아내고, 맨손으로 개지렁이 잡아서 낚시바늘에 꿰고요. 그런데 무대 영상을 찾아보면 이 애들이 얼마나 단련돼 있는지 또 알게 되죠. 그 낙차가 매력입니다.
둘째, 절실함을 전시하지 않았다는 것. 절실한 중소 아이돌은 지금도 수백 팀입니다. 절실함만으로 사랑받을 수 있으면 다들 사랑받아야죠.
리센느는 "저희 정말 간절합니다" 같은 호소를 한 적이 없어요. 그냥 했습니다. 되든 안 되든 유튜브를 켜고, 사투리 쓰고, 갸루 연구하고, 고향에 내려갔어요. 그러니까 행동에 절실함이 묻어난 거고 사람들이 그 차이를 귀신같이 알아챈 겁니다.
전시된 절실함은 동정을 얻고, 전시되지 않은 절실함은 응원을 얻어요. 동정은 클릭 한 번으로 끝나는데 응원은 구독이 되고 스트리밍이 됩니다.
LOVE ATTACK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한 번도 빛난 적 없었던.
이게 자기들 얘기처럼 들리니까 사람들이 더 모인 거죠. 노래가 밈을 만든 게 아니라, 멤버들한테서 발견된 매력이 묻힐 뻔한 노래를 다시 불러낸 겁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케이팝은 빨리 변하고 역주행의 관심이 언제까지 갈지도 모르죠.
근데 이 팀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자리에 있는 건 확실해요. 그리고 그 자리까지 오는 데 1천만원으로 시작한 회사가 버틴 시간이 있었습니다.
향기 하나 남기겠다고 지은 이름인데, 이제 막 사람들이 그 향을 맡기 시작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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