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시즌3, 여행 마지막 밤에 폭풍우가 왔다.
천장이 찢어져서 구멍으로 비가 들이쳤다. 빠니보틀은 그 구멍을 자기 몸으로 막고 있었다. 형, 텐트가 찢어졌어, 하고 그가 소리쳤다. 바람이 하도 세서 누가 밖에서 텐트를 흔드는 줄 알았다고 나중에 말했다.
기안84는 그 옆에 누워 있었다.
그냥 자자고, 하고 그가 말했다.
빠니보틀이 어이없어했다. 여기서 어떻게 자냐고. 그러자 기안84가 이렇게 답했다. 번개 안 치니까 잘 만하다고.
번개 치면 우리 죽는다고 빠니보틀이 말했다. 기안84는 번개는 안 치고 비만 오잖아, 라고 했다. 그러고는 진짜로 잤다.

*한 사람은 구멍을 막고 한 사람은 자겠다고 누워 있었다*
그날 밤 결국 번개가 쳤고, 넷은 제작진 텐트로 대피했다.
젖은 채로 앉아서 그가 한 말이 있다.
내일 해가 안 뜨고 이런 날씨가 이어지면 우리는 첫 해가 아니라 첫 번개를 보러 가자고. 첫 해를 본다는 식상한 생각을 버리라고.
다들 웃었다. 살면서 첫 번개라는 말은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다고 누가 말했다.
그러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자기는 포장지 속에서 사는 느낌이었다고. 그런데 여기 오니까 계속 비바람이 치고 아드레날린이 나오고, 살아 있다는 감각이 든다고. 야생이고 자연 그 자체라서 그렇다고.
포장지 속에서 산다는 말을 그가 먼저 했다. 나중에 사람들이 그 말을 받아서 그를 설명하는 데 쓰기 시작했다.
새벽에 인터넷이 안 돼서 그는 벽돌깨기 게임을 했다. 이거 하다 보면 꿀잠이 온다고 하면서.
다음 날 아침에 해가 떴다.
넷이 다 같이 그걸 봤고, 거기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딱 일 년 전에 해 지는 걸 시언이랑 빠니랑 같이 봤고, 한 다섯 달 전인가 인도에서 해 뜨는 걸 혼자 봤고, 오늘은 다 같이 해 뜨는 걸 봤네요.

혼자 봤다는 말이 가운데 들어 있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고 그는 이었다. 마흔이 되니까 점점 더 빨리 가는 것 같다고.
그러고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엔 뭘 해도 재미가 없고 이미 다 해본 거고 매너리즘에 빠지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고, 그냥 양식당하는 광어 같다고. 살기 딱 좋은데 살아 있는 느낌이 안 들지 않느냐고.
이 문장은 그날 밑에 여러 사람이 그대로 옮겨 적었다.
도피라고 하면 도피고 제2의 인생이라고 하면 제2의 인생이고, 그런 걸 꿈꿔보지 않느냐고 그는 물었다. 시즌1에서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자기랑 아예 상관없는 낯선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건 낮잠을 자고 있건 그런 걸 보는 게 너무 좋다고.
여행이 끝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원래 양식 광어였는데 자연산 광어마냥 자기가 어느 정도 자연산이 된 것 같다고.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같은 자리에서 그가 고마운 걸 하나 더 꼽았다.
시작할 때는 한 명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첫 시즌에 그의 옆에 있던 사람은 이시언 하나였다. 그런데 하다 보니 빠니보틀도 알게 되고 덱스도 알게 됐다고. 세계관이 합쳐졌다는 표현을 썼다.
그 말이 끝나고 빠니보틀의 인터뷰가 붙었다.
처음에는 형의 여행을 서포트하러 온 거였다고 그가 말했다. 그런데 시즌3까지 하다 보니 형의 여행이 아니라 자기 여행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울먹이다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내께 돼버렸어잉.
그날 밑에 달린 400개 중 93개가 웃었다는 말이었고 39개가 울었다는 말이었다. 같은 장면에서 웃고 울었다는 뜻이다. 눈물 나려는데 여기서 빵 터졌다고 적은 사람이 여럿이었다.
남의 여행인 줄 알았는데 내 여행이 됐다는 말. 이 프로그램에서 나온 문장 중에 제일 좋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팬들이 만든 단어 중에 기안화라는 게 있다.
이 사람과 같이 다니다 보면 점점 그를 닮아간다는 뜻이다. 짐을 안 챙기고, 아무 데나 눕고, 더러운 걸 안 따지고, 계획을 안 세우는 쪽으로.
인도 편에서 침대가 축축하다며 치우고 다니던 사람이 마지막 시즌에서는 모래 위에 그냥 드러누워 있었다. 그걸 보고 누가 이렇게 적었다. 네 명이 다 정신줄 놓고 모두 기안화 되는 모습.
번아웃으로 고립되고 싶어 했던 사람이 모래에 눕게 되기까지 시즌 셋이 걸렸다.
그러니까 기안화는 지저분해지는 게 아니었다. 뭘 좀 내려놓는 것에 가까웠다.
그가 뭘 해서 그렇게 되는지 생각해봤는데, 가르치는 건 확실히 아니다. 여행지에서 그는 조언을 하지 않는다.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먼저 눕고 먼저 들어가고 먼저 먹는다.
악어가 있을지 모르는 강에 뛰어들고, 갠지스강에 들어가고, 길에 퍼질러 앉아서 먹는다. 볼리비아의 한 가정집에 머물렀을 때는 그 집 가족한테 당신의 삶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우리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생활 방식이었는데도 그랬다.
마지막 시즌은 네팔과 티베트였고, 거기서 넷은 오체투지를 했다. 몸의 다섯 군데를 땅에 붙이며 절을 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체력 훈련이 아니라 정신 훈련 같았다고 그는 말했다. 무리하지 말고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고 하면서 시작했다.
가다가 티베트 사람들이 빵을 나눠줬다. 그가 원래 초콜릿이 든 빵을 안 좋아한다고 했다. 바게트 같은 걸 좋아하지 그런 건 안 먹는다고. 그런데 그걸 먹고 거짓말처럼 힘이 났다고 한다. 원래 못 할 뻔했는데 먹고 나니까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고.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분이 엄청 힘이 됐어. 저 마음이 뭔지 아시는 거지.

절을 하면서 그는 자꾸 간절해졌다고 했다. 중간에 포기하면 자기 바람이 안 이루어질까 봐 불안했다고. 그런 얄팍한 생각이 들더라고 스스로 말했다.
땅바닥에 자기를 내려놓는 자세 때문인지 살아온 걸 되돌아보게 됐다고도 했다. 거만해지거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 자신을 낮춰주고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행위가 아닌가 싶다고.
그리고 조금 지나니까 머리가 텅 비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여행자 모드에서 마지막을 수행자 모드로 돌아간 것 같다고.
이 대목이 제일 좋았다.
처음에는 다섯 걸음에 한 번씩 절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빠니보틀이 처지기 시작하자 세 걸음에 한 번으로 바꿨다. 얼마 안 남았으니까 3보1배로 가는 게 낫겠다고 누가 말했고 그렇게 바꿨다.
먼저 도착한 다음에도 빠니보틀이 안 보였다. 그래서 그는 탑을 계속 돌았다.
충분히 왔다고 옆에서 말하는데도 계속 돌았다. 빠니가 올 때까지.

*먼저 도착하고도 동료가 올 때까지 탑을 돌았다*
빠니보틀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누워서 생각하는데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지 싶었다고. 형들은 완주했는데 자기는 못 하면 그냥 거기 표시해놓고 그만하려고 했다고.
그런데 형이 안 가고 탑을 돌고 있었던 것이다.
기안84가 이 일을 두고 한 말은 이랬다.
인생도 빨리 뭘 하는 게 목적이 아니잖아요. 5보를 걷든 3보를 걷든 중간에 쉬든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고, 자세가 좀 틀리다고 해서 그게 오체투지가 아닌 것도 아니고. 저는 너무 좋더라고요, 그게.
이 사람의 인생관이 여기 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빨리 가는 게 목적이 아니고, 남이 자세를 평가하지 않고, 그러니까 아무도 탈락하지 않는 것.
기안화라는 게 왜 생기는지도 여기서 좀 알 것 같았다. 이 사람 옆에서는 못해도 되니까.
수행자 모드로 돌아간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돌아갔다는 말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티베트에서 뭘 배워 온 게 아니라 원래 그렇게 살던 사람이 거기까지 간 것이다.
혼자 사는 걸 찍는 프로그램에 그가 나온 지는 십 년이 넘었다. 거기서 먹고 남은 닭뼈를 가방에 넣는 장면이 나온 적이 있다. 스튜디오가 뒤집어졌고, 집에 가서 뼈는 뺐냐, 가방에서 뼈 나오면 사람들이 오해한다는 말이 나왔다.
다만 옆에 있던 사람이 한마디로 정리했다. 바닥에 버릴 수는 없으니까.
그 말이 맞았다고 생각한다.
기상천외한 짓으로 소비된 장면인데 안에 들어 있는 건 하나뿐이다. 길바닥에 안 버린다는 것. 더럽다는 소리를 듣는 쪽을 골랐을 뿐이다.
한 번은 뼈해장국을 다 먹고 났더니 그릇 안에서 사마귀가 나왔다고 했다. 항의를 하려다가 그냥 계산하고 나왔다고. 방송에서는 내향적이라 그렇다는 쪽으로 정리됐다. 그건 잘 모르겠다.
먹는 것도 비슷하다. 남은 재료를 버리는 걸 못 견뎌서 다 넣고 비벼버린다. 남은 면과 즉석밥과 차돌박이와 김치와 마늘을 한 냄비에 몰아넣는 걸 본인은 짬 처리 다이닝이라고 불렀다. 괴식이라는 말을 오래 들었다.
길가에 새끼 뱀이 있는 걸 봤을 때는 옷으로 덮어서 풀숲에 놓아줬다고 한다. 살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인도에서는 손으로 밥을 먹었다. 숟가락을 달라고 하는 게 이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도 숟가락이 없었으면 자기는 아마 손으로 먹었을 것이라고 했다.
갠지스강에서는 강물을 그냥 떠서 마셨다.
이걸 두고 불교에서 추구하는 것과 비슷한 데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미물을 죽이지 않고, 음식을 남기지 않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자유로운데 겸손하다는 것이다.
나는 종교를 잘 모른다. 본인이 그런 걸 염두에 두고 산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최애 드라마가 태조 왕건이고 스무 번 넘게 봤다는 사람이다. 좋아하는 인물은 궁예다. 관심법으로 사람을 죽인 쪽이다. 성인군자 자리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까 규범을 지키는 게 아닌 것 같다. 닭뼈를 길에 버리는 게 그냥 싫고, 뱀이 밟혀 죽는 게 싫고, 남은 밥이 버려지는 게 싫은 것이다. 싫은 걸 참지 않으니까 주머니에 뼈가 들어간다.
같이 다니던 사람들이 짐을 안 챙기게 되는 것도 아마 여기서 오는 것 같다. 이 사람에게 규칙이 없는 게 아니다. 규칙이 자기한테만 걸려 있고 남한테는 안 걸린다.
그가 그린 만화를 기억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아주 못나게 나온다. 비겁하고 초라하고 부끄러운 부분을 봐준 적이 없다.
방송 초기에도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기묘한 생활 태도와 알 수 없는 정신세계 때문이었다. 그런 시기가 분명히 있었다.
그 시절의 그를 사람들이 뭐라고 불렀는지는 여기 옮기지 않겠다. 다만 방송에 나온 그를 보고 웃던 웃음과 지금 그를 보고 웃는 웃음이 완전히 다른 종류라는 건 말해두고 싶다. 예전에는 이상한 사람을 구경하는 쪽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적었다. 하마터면 엉뚱하고 약간 천덕꾸러기처럼 방송에서 자리매김할 뻔했는데, 여행에서 진솔한 인간미를 담아줘서 다시 보게 됐다고. 오히려 닮고 싶은 사람이 돼버렸다고.
한 시상식 영상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기안형 수상소감 편안하게 보기까지 10년 걸렸네.
십 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 십 년 동안 그가 뭘 바꿨는지는 잘 모르겠다. 옷도 그대로고 말투도 그대로고 여전히 짐을 안 싸고 다닌다. 술자리에서 하던 얘기를 방송에서도 그대로 하고, 남들이 안 하는 짓을 여전히 한다.
그러니까 바뀐 건 그가 아니라 그를 보는 쪽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경우가 사실 흔하지 않다. 대개는 미움받는 쪽이 자기를 깎아서 맞춘다. 이 사람은 그걸 안 했는데 십 년이 지나니까 사람들이 자리를 옮겨줬다.
그 시상식에서 그는 자기 이야기를 짧게 하고 함께한 사람들의 이름을 먼저 불렀다. 만화가로 십 년쯤 살다가 우연히 방송에 오게 됐고 좋은 제작진을 만난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떨렸는지 프로그램 이름을 틀리게 말했다. 태어난 김에 산다, 라고.
만화 속에서는 사람을 못나게 그리는데 여행지에서는 아무도 깎아내리지 않는다. 나는 이게 모순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못났다는 걸 정확히 아는 사람만 그 못남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 옆에 있으면 자기 못난 부분을 숨길 이유가 없어진다. 기안화라는 건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여행의 마지막 시즌에서 그는 울면서 인사를 했다. 오체투지를 하고 난 뒤로 눈물이 많아졌다고 했다. 여행자가 아니라 수행자가 된 것 같다고도 했다.
사실 오늘 해 뜨는 걸 못 볼 줄 알았는데 저기 저렇게 해가 뜨네요. 여러분들의 인생에도 저런 광명이 비추는 미래가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렇게 끝냈다. 다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좋은 데 많이 구경하고, 미련 없이 살다가 가시라고.
*이 글은 계속 고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