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예능에서 과학 커뮤니케이터와 무속인이 마주 앉은 적이 있다.
주제는 귀신이 있느냐 없느냐였다. 판이 그렇게 깔렸으니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져야 하는 자리였다. 무속인이 작두 이야기를 꺼냈다. 돼지를 메고 칼날 위에 올라가는데 발이 안 다치는 걸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고.
궤도는 칼날의 각도와 분자 구조 이야기를 조금 했다. 그러다 말을 멈추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건 상황을 봐서 검증해 볼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 검증하는 게 과학의 역할은 아니라고.
나는 그 장면에서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다고 한 건 이런 뜻이다.
그는 분명히 이길 수 있었다. 한쪽은 십 년 넘게 그 이야기만 해온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그날 처음 마주 앉은 사람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삼 분이면 끝났을 자리다.
그런데 그가 하지 않았다.
이 장면을 두고 사람들이 하는 말은 대체로 비슷하다. 착해서 참는 게 눈에 보인다는 것. 성격이 조금만 모났으면 저 자리가 진작 끝났을 거라는 것. 사람들은 그가 이기는 걸 본 게 아니라 이기지 않는 걸 본 것이다.
이 사람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이 꺼내는 고백이 비슷하다. 나는 문과라서 과학을 포기했는데 이건 끝까지 봤다는 말. 학창 시절 과학 선생님이 이 사람이었으면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는 말. 석사 시절에 자기가 딱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질문만 많았다는 말. 죽는 게 무서웠는데 인간이 우주에서 얼마나 작은지를 알고 나서 오히려 편해졌다는 말.
전부 과학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가 어디서 주눅 들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 사람한테 지식을 배운 게 아니라 뭔가 다른 걸 돌려받은 것 같다. 그게 뭔지가 궁금해졌다.
착해서 참는 거라는 해석은 나는 절반만 맞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나머지 절반에 대한 것이다.
다른 영상에서 그는 혼자 앉아 달 착륙 음모론 이야기를 한다.
성조기가 왜 펄럭이느냐, 별이 왜 안 보이느냐, 이륙하는 장면은 대체 누가 찍었느냐. 그가 하나씩 답한다. 깃발은 위에 대를 넣어서 편 것이고, 별은 달이 너무 밝아서 노출을 짧게 준 탓이고, 이륙 장면은 앞서 갔던 탐사선이 두고 온 월면차의 카메라가 지상에서 원격으로 찍은 것이라고.
여기까지는 그냥 반박이다.
재미있는 건 그 월면차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었다. 그가 굳이 15호와 16호 얘기를 꺼낸다. 지상에서 카메라를 돌려 이륙 장면을 잡으려고 했는데 통신에 지연이 있어서 화면이 자꾸 놓쳤다는 것이다. 15호도 실패하고 16호도 실패했다. 지상국 사람들이 그걸 연습했다. 그래서 17호 때 겨우 제대로 찍었다.
그러고 나서 그가 이렇게 말한다. 이건 카메라맨이 먼저 가 있었던 게 아니라, 인간의 노력과 연습이 열매를 맺은 거라고 봐야 한다고.
나는 이 대목이 오래 남았다.
음모론을 깨는 데 필요한 정보는 이미 두 문장 앞에서 다 나왔다. 카메라는 지상에서 조종했다, 끝. 그런데 그는 실패한 두 번을 굳이 붙였다. 논쟁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정보다. 오히려 "봐라, 그때도 제대로 못 찍었잖아" 하고 되치기당하기 딱 좋은 정보다.
그걸 알면서 붙인 것이다.
같은 영상에 이런 대목도 있다. 그러면 왜 지금은 달에 안 가느냐는 질문.
여기서도 그는 반박부터 하지 않는다. 지금도 간다고, 아르테미스 계획이 이미 시작됐다고 말하고 나서, 대신 예전보다 훨씬 신중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예전에는 사고가 나면 어쩔 수 없는 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가 경쟁하던 때였으니까 국가가 나서서 묵념을 하고 숭고한 희생으로 만들었다고.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못 한다고 그는 말한다. 사람이 죽으면 안 되니까.
말하자면 그는 아폴로와 아르테미스의 차이를 기술로 설명하지 않고 사람 목숨값으로 설명했다. 그러면서 아폴로 11호에 탔던 세 사람의 이름을 굳이 다 부른다.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마이클 콜린스. 위기가 정말 많았는데 그 셋이 기가 막히게 대처했다고.
달에 못 내리고 궤도만 돌았던 사람의 이름까지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상의 끝에서 그가 이런 말을 한다. 음모론에 빠지는 건 그분들 탓이 아니라고. 뭔가 문제가 있거나 어려움이 있어서 믿는 게 아니라,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아서 빠진 부분을 스스로 메우다 보니 그렇게 되는 거라고.
거기서 멈췄으면 그냥 너그러운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한 문장을 더 붙인다.
음모론에 빠져 있는 게 신뢰가 간다면 그건 과학자들 탓이 좀 있다고. 자기 같은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 탓이라고. 그러니까 스스로를 탓하지 말고 저희를 탓해달라고.

논쟁을 하러 나온 사람이 논쟁의 마지막에 자기 책임을 말한 것이다.
그가 자기 롤 모델로 꼽는 사람이 칼 세이건이다.
세이건이 한 일 중에 골든 레코드라는 게 있다. 금으로 도금한 엘피판에 지구의 소리를 담아서 우주로 보낸 것이다. 쉰다섯 나라의 인사말, 고래 울음소리, 천둥소리, 클래식 음악. 아이들 사진과 숲 사진.
궤도는 그걸 유리병 편지라고 부른다. 누가 받을지 모르는데 일단 내 이야기를 잔뜩 적어서 보내보는 것.
이 판이 외계 생명체에게 닿아서 우리가 의도한 대로 재생될 확률을 높게 본 과학자는 거의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확률이 거의 없다는 걸 알면서 보낸 것이다.
세이건이 그 무렵에 한 다른 일이 『코스모스』였다. 책과 다큐멘터리를 같이 냈는데, 그가 기획하고 대본을 쓰고 직접 출연했다. 다큐멘터리인데 전 세계 인구의 삼 퍼센트가 봤다고 한다.
궤도가 그 이야기를 하면서 덧붙인 대목이 있다. 그때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천문학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한잔하자, 야 너 코스모스 봤어, 기가 막히더라. 그런 식으로.
그리고 그해에 망원경이 갑자기 팔리기 시작했고, 동네마다 천문 동아리가 생겼고, 학생들이 장래희망 칸에 우주 과학자라고 적기 시작했다.
우주로 보낸 판은 아직 아무한테도 안 닿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같은 시기에 지구 안에서 보낸 편지는 닿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나는 저 판과 실패한 월면차 두 대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닿을 확률이 낮은 걸 알면서 보내는 일. 그러니까 그가 무속인 앞에서, 음모론을 믿는 사람 앞에서 하고 있던 것도 논쟁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건 편지를 보내는 쪽에 가까웠다.
논쟁은 지금 앞에 앉은 사람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고, 편지는 언젠가 열어볼 사람한테 보내는 것이다. 이기려는 사람은 상대의 빈틈을 찾고, 편지를 쓰는 사람은 상대가 뭘 몰라서 저러는지를 찾는다. 실패한 월면차 두 대는 빈틈을 찾는 사람의 문장에는 절대로 안 들어간다.
여기서 아까 미뤄둔 나머지 절반이 나온다.
우리는 그 장면을 보고 착해서 참는다고 읽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에 대해 말한 건 정반대다. 그는 자기가 참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자기가 못 전한 탓이라고 말했다.
이 낙차가 나는 좀 서늘했다.
참았다는 건 상대를 아래에 두고 한 발 물러난 것이다. 못 전했다는 건 애초에 위아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칭찬한 방식이 사실은 그가 하지 않으려는 바로 그 일이었던 셈이다.
한 번은 그가 귀신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귀신한테도 과학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고. 그분도 과거의 호모 사피엔스였던 존재라고.
농담처럼 지나간 말인데 나는 저 문장이 이 사람을 제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있다고 인정한 것도 아니고 없다고 자른 것도 아니다. 그냥 있다고 치면 그쪽도 사람이었을 테니 설명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설명해줄 수 있다. 그게 이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기본값인 것 같다.
본인도 그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과학적인 정보만 계속 나열하고 늘어놓는 건 어떻게 보면 지식 자랑하는 형태가 될 수 있다고. 그러면서 자기가 하는 일을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얼마나 더 겸손해야 할지, 사람을 어떻게 배려하며 살아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고.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자기 직업을 설명하면서 과학 얘기를 하나도 안 한 것이다.
물론 나는 이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방송에서 본 게 전부고, 카메라 밖에서는 답답해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이 글을 쓰면서 계속 생각난 게 하나 있다.
그는 다른 자리에서 이런 말도 했다. 지식은 이미 여기저기 널려 있는데, 우리가 그걸 가까이 가려 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못 가는 것뿐이라고.
가려 하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이 어디서 오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어릴 때 손 들고 물어봤다가 그런 것도 모르냐는 말을 들었거나, 회의에서 모르겠다고 했다가 방 공기가 잠깐 바뀌었거나, 아니면 그냥 옆 사람이 다 아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나도 끄덕였거나.
한 번 그러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안 묻게 된다. 모르는 게 늘어서가 아니라 물어보는 일이 무서워져서 안 묻는 것이다.
이 사람이 하는 일은 그러니까 과학을 알려주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물어봐도 되는 자리를 만드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그가 상대를 안 이기는 것이고, 실패한 월면차 두 대를 굳이 붙이는 것이고, 마지막에 저희를 탓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 앉아본 사람은 안다. 거기 앉으면 몰라도 괜찮아진다.
우리가 그를 착하다고 부를 때, 사실 우리가 부러워하고 있던 건 그의 성격이 아니라 그 자리였던 게 아닐까 싶다. 누군가 나한테도 한 번쯤 그런 자리를 내줬으면, 하는 마음.
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모르겠다고 말해봤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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