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1,230명. 영상 조회수는 대부분 두 자리입니다. 6회짜리도 있어요.
그런데 이 채널 며칠째 못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낡은 고서를 펼쳐놓고 한 장씩 읽어주는 채널입니다. 여기까지는 예상 가능하죠.
그런데 영상 목록을 내려보면 이상한 게 섞여 있어요.
내장산 일주문까지 달리며
정읍 망제봉 북쪽에 동죽서원까지 달리며
내장사 법요식날 주막터까지 달리며
출근길에 만난 정읍 구룡동의 개
달린다고요? 고서 채널인데?
계정 표시 이름을 보고 이해했습니다. 역사고서트레일런. 세 개를 붙여놨더라고요. 역사 답사를 달려서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제일 놀란 영상이 단종의 비 정순왕후 생가터 편이었어요. 이 영상은 그나마 조회수가 362입니다.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말합니다.
정읍에서부터 칠보까지 19.2km를 달려서 왔다고요. 그것도 몇 번은 칠보산을 넘어서 오려다가 길이 끊겨서 결국 도로로 돌아왔다는 겁니다.
숨이 좀 찬 상태로 향약이 있던 건물 앞에 서서 설명을 시작해요. 대문에 삼강오륜 글자가 새겨져 있는 걸 짚고, 그 동네가 남전 동네라는 걸 말합니다. 남전여씨의 남전이고 진시황의 아버지 여불위의 성씨가 그쪽이라는 얘기로 넘어가요.
그러다 정순왕후 비각으로 걸어가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정순왕후의 본관이 여산 송씨인데 여산이라는 지명 자체가 진시황의 무덤이 있던 곳에서 왔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무덤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항우가 이미 도굴해서 전쟁 비용으로 썼다고요.
지방 향토사에서 시작해서 진시황릉까지 갔다가 다시 정읍으로 돌아옵니다. 대본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아요. 그냥 걸으면서 생각나는 대로 이어붙이는데 그게 다 연결됩니다.
무슨 영상이 있는지만 봐도 감이 옵니다.
천기대요 중에 잉태하는 법
구한말 편지글 하감상서
아프게도 앞뒤 한 장씩 떨어져나간 중용
중국 책으로 추정되는 명추
한시 계추, 그러니까 병아리 이야기
지방사를 엿볼 수 있는 서생들의 메모
하도낙서, 고서생만의 이해
제목에 감정이 들어가 있는 게 좋아요. 아프게도 앞뒤 한 장씩 떨어져나간이라니. 책이 상한 걸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면 그 책을 어떻게 다루는지는 안 봐도 알 것 같습니다.
댓글이 두세 개씩 달립니다. 그런데 그 두세 개가 다 진짜예요.
한 분은 "제 고향인 칠보 백암리, 옆동네 가셨네요"라고 남겼고, 다른 분은 "저는 정읍 바로 옆 출신입니다, 지방 향토의 역사에 관심이 있습니다, 언제 한번 뵙기를 청합니다"라고 썼습니다.
거기에 채널 주인이 단 답이 이거예요.
"반갑습니다..언제든 연락주시면 뵙도록하겠습니다."
마침표 두 개까지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 채널의 온도가 여기 다 있는 것 같아요.
글씨첩 소개 영상에는 "만산 화기도 맘에 드는 문구네요,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라는 댓글이 하나 달려 있고 거기에도 "감사합니다.." 하고 답이 달려 있습니다.
조회수 121짜리 영상에 댓글 한 개, 답글 한 개. 그게 다인데 이게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ㅠㅠ
저는 달리기 붙은 편부터 보시길 권합니다. 고서 편은 한자가 계속 나와서 처음엔 좀 진입장벽이 있는데, 달리기 편은 풍경이 계속 바뀌어서 따라가기가 쉬워요.
그다음에 고서 편으로 넘어가면 같은 사람이 왜 저 책을 저렇게 조심스럽게 넘기는지가 보입니다.
한 가지 미리 말씀드리면, 자동 자막으로만 봐서 지명이나 인명이 군데군데 뭉개집니다. 칠보가 7보로 나오고 정순왕후가 정수항후로 나와요. 직접 들으시는 게 훨씬 정확합니다. 저도 헷갈려서 몇 번 되감았어요.
그리고 화면 편집은 거의 없습니다. 삼각대도 없는 것 같고 손으로 들고 찍어서 흔들려요. 그게 싫으면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조회수 6짜리 영상이 있는 채널을 소개하는 게 맞나 싶기도 했는데, 여기 게시판이 딱 그런 데잖아요.
정읍 사시는 분 계시면 한번 연락해보세요. 언제든 뵙겠다고 하셨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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