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인간세(人間世) 편에 목수 장석(匠石) 이야기가 나온다. 제나라로 가던 길에 그는 사당 옆에 선 거대한 상수리나무를 지나친다. 그늘이 소 수천 마리를 덮을 만큼 컸고, 구경꾼이 장터처럼 몰려 있었다. 그런데 장석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걸음을 재촉한다. 제자가 이유를 묻자 그는 짧게 답한다. 쓸모없는 나무다.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짜면 금방 썩고, 기둥을 세우면 좀이 슨다.
그날 밤 나무가 꿈에 나타나 따지듯 말한다. 열매 맺는 나무들은 열매가 익으면 가지가 꺾이고, 쓸모 있는 나무는 제 명을 못 채우고 베어진다. 나는 쓸모없기를 바란 지 오래다. 몇 번이나 죽을 뻔하다 이제야 그걸 얻었다. 그것이 나의 큰 쓸모다. 쓸모를 재는 자로 평생 세상을 재던 목수가, 그 자에 걸리지 않는 나무에게 한 수 배운 셈이다.
얼마 전 새벽, 잠이 오지 않아 짧은 영상을 넘기다 한 장면에서 손이 멈췄다. 눈 오는 날 기안84와 일본에서 온 친구가 밖에 앉아 있었다. 딱히 하는 일은 없었다. 술은 뭘 마실까 같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 친구가 자기는 평소에 눈이 니트에 떨어지는 모양을 본다고 했다. 떨어질 때마다 모양이 다르고, 그중엔 트리처럼 생긴 것도 있다고. 예쁘다고. 나는 여기서 한 번 졌다. 눈이 오면 폰을 꺼내 한 장 찍고 끝이다. 찍은 사진을 다시 본 적도 별로 없다.
조금 뒤 행복 이야기가 나왔다. 그녀가 말했다. 행복이 그거래요. 좋아하는 사람이랑 낭비한 시간들. 기안84는 그 말을 한 번 따라 하더니 멋진 말이라고 했다. 흥미로운 건 말끝이었다. ‘그거래요’. 자기 생각이라고 하지 않고, 어디서 들은 말을 건네듯 전했다. 누구에게 들은 건지는 끝내 나오지 않는다. 좋은 말일수록 주인을 밝히지 않고 돌아다니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낭비’라는 단어에서 멈췄다. 하루 끝에 오늘 뭐 했지를 세는 버릇이 있다. 별로 좋은 버릇이 아닌 줄 알면서도 잘 없어지지 않는다. 남은 게 없는 날은 잠들기 전 기분이 좀 그렇다. 작년 겨울 친구와 세 시간을 통화하고 끊으면서 내가 한 말은 ‘아, 시간 다 갔네’였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겨울에서 지금까지 남은 장면은 그 세 시간뿐이다. 장부에는 손실로 적었는데, 돌아보니 그해 유일한 수익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낭비’는 멋을 부린 반어법이 아니다. 그 시간에는 원래 목적이 없어야 한다는 뜻에 가깝다. 목적이 붙는 순간 그건 네트워킹이 되고, 자기계발이 되고, 결국 일이 된다. 장석의 자로 재면 쓸모가 생기는 순간 베어지는 것이다. 쓸모를 묻지 않아야 비로소 살아남는 시간이 있다.
영상 아래에는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잔뜩 적어 놓았다. 저녁마다 부모님과 일일드라마를 보며 아무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는 게 그건가 싶다는 사람이 있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조금은 덜 불안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냥 지나간 기억인 줄 알았는데 그게 행복이었구나 싶어 뭔가 확 풀렸다는 사람도 있었다. 다들 지금 좋은 걸 새로 찾은 게 아니었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다시 계산하고 있었다. 손실로 적어 둔 항목을 하나씩 꺼내 다른 칸으로 옮기고 있었다.
물론, 낭비를 예찬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빈 시간이 행복이 되지는 않는다. 혼자 휴대폰을 넘기다 새벽 세 시가 된 밤은 대개 그냥 피곤할 뿐이다. 그 영상을 본 것도 바로 그런 밤이었다. 그러니 조건이 하나 붙는다. 좋아하는 사람과, 라는 조건이다. 같은 두 시간이라도 누구와 함께였느냐가 그 시간을 어느 칸에 적을지를 정한다. 눈 결정을 들여다본 것도 혼자가 아니라 마주 앉은 사람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주에 아무 계획 없이 만날 사람 하나를 정해 두었다. 뭘 하자고 하지 않고 그냥 만나려 한다. 카페에 가서 별 이야기 없이 두 시간쯤 앉아 있다 올 것 같다. 그게 목적이다. 목적이 없는 게 목적이라니, 장석이 들으면 혀를 찰 일이다.
장석의 나무는 쓸모없어서 살아남았고, 살아남아서 소 수천 마리를 덮는 그늘이 됐다. 며칠 지나면 나는 또 오늘 뭐 했지를 세고 있을 것이다. 다만 낭비했다는 말은 이제 하지 않으려 한다. 그 시간이 몇 년 뒤 그해에서 유일하게 남는 그늘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