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5월 7일 오후 5시,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은행 열아홉 곳의 시험 성적표를 공개했다. 위기 한복판에서 치른 스트레스 테스트였다. 결과는 이랬다. 열 곳은 자본을 더 쌓아야 했고, 아홉 곳은 충분했다. 가장 많이 모자란 곳은 339억 달러였다. 성적이 좋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 발표가 나오기 전까지 시장을 괴롭힌 것은 나쁜 성적이 아니라 성적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은행이 얼마나 구멍이 났는지 아무도 몰랐고, 그래서 모든 은행이 의심받았다.
나쁜 숫자는 견딜 수 있다. 숫자가 없는 것은 견디기 어렵다.
지금 시장에는 그런 발표가 없다. 지난 한 주 코스피는 14% 빠졌고, 외국인은 올해 들어서만 200조 원 가까이 팔았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 시장이 내놓은 답 가운데 하나가 소문이었다. AI 주식에 레버리지를 걸었던 소규모 헤지펀드가 정리 수순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다. 8월에는 이 펀드가 7월 한 달에 44%를 잃었다는 보도가 나왔고, 운용자산은 약 264억 달러, 우리 돈으로 30조 원 안팎이라고 알려졌다. 보유 종목은 최근 시장에서 부진했던 이름들이라고 한다. 공식 확인은 없다. 홈페이지도, 대변인도 없는 곳이니 확인해 줄 사람이 없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30조 원은 시장 전체로 보면 큰돈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크게 흔들리는가.
첫째 이유는 손실 한도다. 헤지펀드를 포함한 많은 펀드에는 최대 낙폭(MDD)이라는 내부 규정이 있다. 고점 대비 일정 비율, 흔히 15% 안팎이 빠지면 포지션을 줄여야 한다. 그 한도를 한 번 넘으면 다음 달에 반등했다고 해서 규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연간으로는 아직 벌고 있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한 번 넘은 한도는 계속 줄이라고 요구한다. 누적 수익률이 200%에서 65%로 줄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는데, 이 역시 확인된 숫자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보다 구조다.
둘째 이유는 파는 방식이다. 개인은 평균 단가 위에 있으면 버틸 수 있다. 하지만 레버리지를 쓴 펀드는 팔면서 자기 손익을 깎는다. 10%를 팔려고 내놓으면 가격이 밀리고, 아직 들고 있는 90%가 그 가격에 맞는다. 파는 사람이 자기 포지션을 스스로 죽이는 셈이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문제는 이 펀드 하나인가. 아니다. 같은 종목에 같은 방향으로 베팅한 곳이 이곳뿐일 리 없다. 하나가 보였다면 비슷한 처지의 다른 곳이 있을 수 있다. 시장이 지금 가격에 반영하는 것은 이 펀드의 손실이 아니라 "다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물론 반론이 가능하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고, 가격이 이미 빠질 만큼 빠졌다는 반론이다. 맞는 말이다. 소문이 틀렸다면 조용히 사라질 것이고, 그때는 오히려 크게 반등할 수도 있다. 소문을 전한 쪽도 이것이 실제 상황인지 가격이 빠지니 소문이 붙은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인정했다. 그러니 소문 자체를 믿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기억해 둘 것이 있다. 이런 종류의 불안은 큰 헤드라인이 나올 때가 아니라 기사 아래쪽 작은 문장에서 먼저 움직인다는 점이다. 헤드라인은 가격에 이미 들어 있다. 반대로 어느 날 작은 기사 하나가 "정리가 끝났다" 혹은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확인해 준다면, 그날 시장은 숫자가 아니라 숫자가 생겼다는 사실에 반응할 것이다. 2009년 5월 7일이 그랬다.
그러니 지금 해야 할 일은 소문의 진위를 맞히는 것이 아니다. 확인되지 않은 공포 앞에서 가격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지켜보는 일이다. 현금이 있다면 한꺼번에 들어가기보다 며칠에 나눠 들어가는 쪽이 낫다. 숫자가 나오는 날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지켜볼 수 있는 것을 보면 된다. 가격이다.
시험 성적표가 공개되던 그날 오후 5시를 사람들은 기다렸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도 비슷하다. 좋은 숫자가 아니어도 된다. 숫자면 된다.
이 글은 알상무 방송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정리했습니다. 같은 방송을 숫자와 표로 정리한 글은 코스피 주봉 -14% 뒤 월요일 전략, 알상무 지표추적자 1018 (10월 18일)에, 가볍게 읽는 버전은 떨어지는 시장에 찬물 입수하듯 들어가는 법: 5일 분할 매수와 10% 손절에 있습니다.
원본 영상: [알상무 「아직도 해맑네? 월(19일) 주식 전략 [지표추적자 1018]」](https://www.youtube.com/watch?v=mWtd1Yn3F_U)